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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숙" 『셜리발렌테인 그리스 가다』
셜리발렌테인은 뚱뚱한 중년, 나 닮은 아줌마다. 벽보고 웃고 벽보고 화내고. 나처럼 벽보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사이즈66레이스 달린 청자켓 몰래 사들고 들어와 울퉁불퉁 숨막히게 끼어 입는다. 모델처럼 빙빙 돌며, 괜찮지? 벽보고 싱겁게 교태도 부린다. 그녀의 꿈은 부엌 찻장 뒷면에 한장으로 붙어있다. 그리스. 12일 동안 날아갔다 돌아오기. 돌아올 수 있을까?
믿어줄까, 받아줄까,
내 자리는 비어 있을까,
곱씹고 씹는 사이
나는 몽쉘뚱뚱 아줌마가 되었다
맛도 없는 불량과자
쓸데없는 포장지만 뻔덕거린다.
새떼처럼 까맣게 흩어지는 내일
포스터 한 장 찻장 뒷면에 붙여 놓고 셜리발렌테인은 오늘도 망설인다.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옷 홀랑 벗고 지구 위의 한 점 어디
에메랄드빛의 깊은 바다에 뛰어들어
수면 위로는 절대 떠오르지 않을 거다
그냥 한 사흘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놀거다.
셜리발렌테인은 드디어 그리스로 떠났다. 이후로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밥 짓고 설거지한다.
고실고실 밥물에 뜸들 때까지
벽보고 희죽희죽 벽치기 한다.
숨소리도 행여 새나가지 못하게
문이란 문 쾅쾅 때려 잠근다.
집안의 틈이란 틈, 물샐 틈 없이
닦고 문지르고 털고 조이고.
뜻밖의 내일 얼씬도 못하게
내가 나를 철통 같이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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