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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Development/Horizons

DEX는 왜 민첩이 되었을까?

태뽕이 2023. 7. 21.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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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하다 보면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별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꽤 많습니다. 으시기의 WHY'는 우리도 모르게 굳어져 버린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왜' 그랬을지 이야기해보는 기획입니다.

 

STR, DEX, INT, WIS, CON, CHA

캐릭터의 능력치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이는 단어들입니다. 게이머라면 제가 별다른 설명 없이 '제 캐릭터의 능력치는 STR 50, DEX 25, INT 10 (중략) 입니다.'라고 이야기해도 '아, 힘캐구만'하고 이해할 수 있죠. 게임에 따라서 조금 다를 때도 있지만, 보통은 능력치를 표현할 때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DEX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민첩'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전을 펼치고 DEX의 원 단어인 Dexterity의 뜻을 찾아보면 이럴 수가, '(손이나 머리를 쓰는)재주'라고 합니다. '민첩'이라는 뜻에는 몇몇 게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AGI(agility)이 더 맞다고 해요.

 

 

 

재주를 뜻하는 'DEX'는 게임에서는 왜 민첩이 되었을까요?

▶사전적 의미는 '네이버 사전'을 참고했습니다.

 

 

 

- D&D의 DEX, 위저드리와 울티마의 AGI

먼저, DEX와 AGI이 어디서 먼저 시작됐는지 이야기해봅시다.

DEX의 기원은 TSR이 만든 RPG 시스템 '던전 앤 드래곤(Dungeons & Dragons, 이하, D&D)'입니다. D&D에는 캐릭터의 능력치를 STR(strength, 힘), DEX(dexterity, 민첩), CON(constitution, 건강), WIS(wizdom, 지혜), INT(intelligence, 지능), CHA(charisma, 카리스마)로 표현합니다. DEX는 보통 정교함, 순간적 반응, 균형감각 등을 나타내죠. AC(Armor Class, 해당 캐릭터를 명중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타내는 수치)에도 영향을 준다고 해요.

 

최초의 RPG 시스템이자 현존하는 수많은 RPG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던전 앤 드래곤인 만큼, DEX 역시 위의 의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유명하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D&D 베이식 세트의 플레이어 매뉴얼

 

그렇다면 Agility(이하, AGI)는 어디서 시작된 걸까요? 가장 유력한 건 서테크의 '위저드리'와 EA의 '울티마'로 보입니다. '마이트 앤 매직'과 함께 3대 CRPG(Computer RPG)로 손꼽히던 게임들이죠. 두 게임 모두 DEX 대신 AGI을 사용하는 게임입니다.

 

울티마의 AGI은 공격의 명중률이나 적의 공격을 회피할 확률, 도둑질에 영향을 주며, 위저드리의 AGI은전투시의 행동 순서와 보물 상자의 함정 조사 및 해체 성공률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DEX나 AGI 모두 손재주와 민첩함을 관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저드리 첫 작품의 캐릭터 능력치 세팅 화면

 

▶울티마 첫 작품의 캐릭터 능력치 세팅 화면

그런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게임을 만들 때 이미 잘 알려진 D&D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개발하는 입장에서도 쉽고,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적응하기 쉬우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위저드리를 만든 로버트 우드헤드도 2014년 11월 1일 hardcoregaming101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D&D의 팬이라고 이야기했고, PLATO*를 통해 D&D에서 영감을 얻은 Avatar이나 Oubliette 등 CRPG를 즐겼다고 했습니다. 이 게임들은 위저드리에 영감을 준 게임이기도 했으며, 능력치 표현은 D&D의 그것과 동일했죠.

*PLATO: 세계 최초의 컴퓨터 보조 지시 시스템. 일리노이 대학에서 교육용으로 개발했으며, 온라인 커뮤니티의 기원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위저드리도 같은 시스템을 사용하면 편했을 텐데, 굳이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위저드리의 개발 과정을 살펴보면, D&D의 제작사 TSR과의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함이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위저드리에 영감을 준 게임 중 하나인 Oubliette. 1977년에 나온 게임이라고 하네요.

 

위저드리는 출시 전 1981년 6월 6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 애플페스트에서 초반 3개 레벨의 던전이 포함된 데모 버전을 판매했습니다. 비디오 게임 역사상 최초의 얼리 액세스 모델로 여겨지기도 한다네요. 아무튼, 이 당시 위저드리의 부제는 'Dungeons of Despair'이었습니다.

 

이 데모 버전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해요. TSR도 이때 위저드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죠. 그런데 D&D의 제작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한 TSR의 개리 가이객스는 '위저드리의 부제인 Dungeons of Despair의 약자가 던전 앤 드래곤의 약자 D&D와 유사함'을 우려해 서테크에 법적으로 문의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 소송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만, 1981년 9월 정식 출시된 위저드리의 부제는 'Proving Grounds of the Mad Overlord'로 바뀌었습니다. 법적인 분쟁을 미리 회피한 것이라 볼 수도 있죠. 로버트 우드헤드가 직접 그렇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게임 부제의 약자를 가지고 유사성을 지적할 정도면, 게임의 내용도 지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DEX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AGI이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위저드리의 첫 작품 Wizardry: Proving Grounds of the Mad Overlord의 패키지

 

저작권과 관련해 게임 내 표현을 바꾼 사례에는 '폴아웃'도 있습니다. 폴아웃은 처음에 미국의 RPG 시스템 중 하나인 GURPS의 라이선스를 받아 개발 중이었습니다. GURPS의 기본 능력치는 ST(Strength), DX(Dexterity), IQ(Intelligence), HT(Health)의 네 개로, 원래라면 폴아웃도 이 시스템을 사용할 예정이었죠.

 

하지만 GURPS 원작자인 스티브 잭슨이 폴아웃을 보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표현의 수정, 그리고 이제는 폴아웃의 상징과도 같은 '볼트보이'를 제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핵심 개발자인 '팀 케인'을 비롯한 개발자들은 이에 불응했고, 결국 라이선스가 취소돼 'S.P.E.C.I.A.L'이라는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S.P.E.C.I.A.L'은 인터플레이의 기획자 크리스 테일러가 만든 TRPG 시스템을 베이스로 했다고 해요.

▶다만, 바뀐 뒤에도 Strength가 그대로 들어간 것을 보면, Dexterity를 쓰지 못해 Agility를 넣었다기보다는, 게임의 특색을 주기 위해 바꾼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S.P.E.C.I.A.L! 멋있죠?

 

 

 

- '민첩성', '손재주' 등 신체 운동 능력을 나타내는 대중적인 표현이 된 DEX와 AGI

D&D는 모든 RPG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초창기 CRPG는 D&D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았고, 나중에는 D&D와 정식 판권 계약을 통해 그 세계관과 시스템을 그대로 차용한 게임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편, 울티마와 위저드리 역시 세계 3대 CRPG로 꼽힐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이 게임들 역시 사용된 시스템이나 이런저런 설정들은 후대 게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위저드리는 일본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게임 원작의 애니메이션이 나오기도 하고, 합법적으로 판권을 얻어 제작한 일본산 오리지널 위저드리는 원작 시리즈보다 더 많이 나와있을 정도죠.

▶2011년 플레이스테이션3로 출시된 위저드리: 사로잡힌 망령의 거리

 

이를 이번 주제인 DEX, AGI과 엮어서 생각해봅시다. DEX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D&D, AGI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울티마, 위저드리 모두 큰 인기를 끌어 후대의 게임에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이 두 표현이 주로 쓰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D&D의 요소를 그대로 차용하면 고소당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만 D&D의 모든 요소가 저작권이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D&D에 나오는 요소라도 위자드 오브 더 코스트가 오픈 게임 라이선스로 공개한 내용은 사용할 수 있다고 해요. STR, DEX, CON, INT, WIS, CHA와 같은 능력치가 대표적이죠.

 

그래서 게임 개발자는 DEX와 AGI 중 자기가 만들고자 하는 게임에 적절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DEX가 민첩성과 손재주를 모두 관장하는 D&D와 비슷한 표현을 쓸 수도 있고, DEX에 손재주나 민첩성 중 하나만 적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DEX와 AGI을 모두 넣고 DEX는 손재주, AGI은 민첩성이라는 식으로 나눠서 적용할 수도 있겠죠.

▶DEX를 솜씨로 표현하는 마비노기

 

▶DEX를 민첩성으로 표현하는 디아블로3

 

▶DEX와 AGI을 같이 쓰는 '라그나로크M 영원한 사랑'. DEX는 명중률과 원거리 대미지, 마법 캐스팅 속도를, AGI은 회피와 공격 속도를 올려준다고 합니다.

 

 

 

- DEX가 민첩성이 된 것은 번역의 문제가 아닐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DEX는 D&D에서, AGI은 위저드리와 울티마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D&D는 모든 RPG의 시초라 불릴 정도로 보편적인 RPG 시스템이고, 위저드리와 울티마도 큰 인기를 끌며 후대의 게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능력치 표현에 특별한 사용 제한은 없으므로 대중에게 익숙한 DEX와 AGI은 여러 게임에서 사용된다.', '단, 게임에 따라 DEX와 AGI이 관장하는 능력은 달라질 수 있다.' 정도가 되겠네요.

 

그러면 DEX는 왜 민첩성이 되었을까요? DEX가 민첩성과 손재주 등 신체의 운동 능력을 관장하는 건 알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원래 영어 단어의 뜻과 다르게 부를 이유는 없으니까요. 저는 DEX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D&D를 기준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봤습니다.

 

하나는 D&D가 한국에서 유행할 무렵 일본에서 건너온 표현이라는 겁니다. 한국에는 95년 커뮤니케이션 그룹이 D&D 룰북의 공식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하기 전까지는 한국어로 번역된 룰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나 일본어로 된 룰북을 구해서 번역해 게임을 즐겼다고 해요. 영어야 그대로 DEX로 나왔을 테니, 일본의 번역인 '민첩력'을 따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또 하나는 D&D에서의 Dexterity가 민첩성에 더 가깝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D&D 공식 홈페이지의 베이직 룰 설명에는 Dexterity가 신체의 기민함, 반사 신경, 균형 등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손재주보다는 민첩성에 더 가까운 설명이죠. 앞서 일본의 번역도 이런 점에 집중해 '민첩력'이라 번역했을 가능성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민첩성이냐 손재주냐, 그 게임의 룰을 따르자

'마음대로 자기 몸을 가눌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조정력'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게임에서의 DEX나 AGI도 힘을 제외한 신체 능력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도 있으니, 이거라면 민첩성과 손재주를 모두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어로는 coordination이니 Cod 정도로 표현하면 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 와서 이미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는 표현을 바꾸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또, DEX를 민첩이라고 하는 게임을 잘못됐다고 하기도 애매한 게, D&D의 사례처럼 그 게임에서는 DEX가 민첩의 역할을 하고 있을 수도 있거든요.

 

DEX가 왜 민첩이냐는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사실 'DEX = 민첩'이 훨씬 익숙하고 편해요. 그러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각 게임의 룰을 따르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출처: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050094&memberNo=11710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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